이번 파리 한달살기 가운데 좀 특별한 도전은 제 나름대로 테마 여행을 시도해 본 것이었습니다.
알고 있는 지식과 관심사가 좁다 보니 파리(Paris)라는 큰 바다에서 광어 한 마리 건져 올리는 수준이었지만, 제가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본 시도였습니다.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이름입니다.
건축, 가구, 장식, 혹은 시각 디자인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아마 이 이름을 들어본 분들은 매우 드물 겁니다.
저도 올해 7월까지는 이분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마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경로는 나름 재미있습니다.
저희 집 주변에 '김중업 건축 박물관'이 있습니다. 김중업씨는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시는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저희 중년들에게는 한때 자랑거리였던 삼일빌딩, 그리고 서강대, 제주대, 홍익대, 부산대 본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올림픽 공원의 세계 평화의 문 등과 같은 굵직굵한 건축물들이 이 분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김중업씨의 연대기를 보던 중에 이 분의 건축가로서의 삶에 큰 이정표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코르뷔지에와의 만남은 지역 건축가에 불과했던 그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으로, 철근 콘크리트 건축 구조의 이론을 발표하고 완성한 분입니다. 우리가 아파트라는 건축물을 통해 현대 주거문제를 해결한 데에는 이분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파리에 가면 이 분과 관련된 기념물들을 한번 돌아볼 생각으로 조사하던 중에 코르뷔지에가 파리 16구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설계한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인 빌라 라호슈(Maison La Roche)도 16구에 있고요.
파리 16구는 이전에 저희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점점 구미가 당겨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또 다른 건축가가 레이더망(^^)에 포착되었습니다. 바로,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였습니다.
그도 역시 16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분으로 이곳에 그의 작품이 여러 개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그곳에 살면서도 알지 못하던 사실이었죠.
그래서 이분 건축물들을 탐방하는 것을 이번 여행의 하나의 테마로 추가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중업 → 르 코르뷔지에 → 엑토르 기마르로 제 관심의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아르누보(Art Nouveau)라는 용어를 가끔 보게 됩니다.
불어로 아르(Art)는 '예술', 누보(Nouveau)는 '새롭다'라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예술사조입니다.
아르누보는 19세기 아카데미 예술의 반작용으로 자연물, 특히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 파리 지하철의 입구 구조물입니다.
이 파리 지하철 입구 구조물이 바로 엑토르 기마르의 작품인데 철근 주조물과 유리를 재료로 하여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잘 표현한 장식물로 인정을 받았고, 이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이지만 세련된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구조물입니다.
구글 지도앱에 4곳의 기마르의 건축물의 주소를 저장해 두고, 사진기를 둘러메고 길을 나섰습니다.
카스텔 베랑제 (Castel Béranger) (1898년 완공)
메자라 저택 (Hôtel Mezzara) (1911년 완공)
기마르 저택 (Hôtel Guimard) (1912년 완공)
마지막으로 찾은 Villa La Flore는 건물이 골목 안쪽에 위치하고 있고 진입로가 차단되어 있어서 아쉽게 촬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마다 기마르의 이름이 핸드라이팅으로 새겨진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리(Paris)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된 것은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나폴레옹 3세 시절인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8년 동안 파리시장으로 재직했던 조르주 유젠 오스만( Georges-Eugène Haussmann)에 의해 진행했던 대대적인 도시 구조 개편사업 덕분이니, 길게 잡아도 170년 역사입니다.
그의 주도하에 진행된 철저한 도시계획으로 오늘과 같이 도심을 가르는 넓은 대로들이 만들어졌고, 그 주변에 세워진 모든 건축물들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높이와 외관이 규격화되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저한 규격화는 나폴레옹 3세가 권좌에서 물러나고도 60~70년 이상 지속되면서 파리가 오늘과 같은 독특한 통일성을 갖춘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어진 파리의 건축 양식을 오스만 양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찾아본 엑토르 기마르의 건축물들은 모두 1900년경에 지어졌으므로 오스만 양식의 철저한 규격 기준을 요청받는 시대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기준 내에서 아르누보의 독창성이 최대한 반영한 덕분에 메자라 저택 (Hôtel Mezzara)과 기마르 저택 (Hôtel Guimard)의 경우는 번지수를 보고 찾지 않아도 기마르 작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기존 주택들과 차별화와 조화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것이 엑토르 기마르의 위대성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마르의 주택들을 둘러보면서 건물의 파사드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작품, 카사 바트요(Casa Batlló)와 카사 밀라(Casa Milà)와 유사하다는 인상을 크게 받았습니다. 천채 가우디 역시 시대적으로 보면 아르누보의 영향 속에 있었기 때문이죠.
가우디의 주택들은 훨씬 더 급진적이고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셀로나 여행 중에 이들 건물을 보자마자 바로 '우와~'하고 탄성이 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해보면 너무 큰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이 당시의 파리와 바로셀로나의 건축 환경의 차이, 엄격한 건축 규제를 따라야 했던 파리와 그렇치 않아도 되었던 바로셀로나의 차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나절에 걸친 기마르(Guimard) 테마 투어는 종료된 줄 알았는데, 다음부터는 기마르 (Guimard)가 저희 부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마 (Guimard)가 처음으로 저희를 찾아온 것은 오르세 미술관이었습니다.
주옥같은 오르세 미술관의 명화들을 5층까지 모두 둘러보고, 그래도 아쉬워서 1층에 있는 로뎅의 '지옥의 문' 조각을 한번 더 보고 돌아서려는데 기마르(Guimard)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오르세에서 기마르(Guimard)가 디자인한 가구들을 조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마르(Guimard)와의 두 번째 조우는 이름도 예쁜 '쁘티 팔레(Petit Palais)'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가구 몇 점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위에 제가 방문했던 기마르 저택 (Hôtel Guimard)에 있던 거실 전체를 통째로 보여주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모든 가구와 장식들이 쁘티팔레로 기부가 되어 전시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마르(Guimard) 투어를 하면서 모든 건축물이 사유지라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오르세와 쁘티팔레에서 기마르 (Guimard)의 가구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행운으로 대미를 장식한 저희 부부의 기마르 투어였습니다.
※16구에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빌라 라호슈(Maison La Roche)도 방문했었는데, 이 부분은 별도로 포스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