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 중에 파리를 보면서 느낀 것들을 몇 가지 정리해 봤습니다.
1) 젊어진 파리
한때 프랑스는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대표적인 노령화 국가로 인식되었습니다.
20여 년 전, 주재원 시절에 아내와 함께 주말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곱게 화장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할머니들이 카페나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백발임에도 단정하면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마치 TV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유한 계층이나 귀족들의 모습 같아서 당시에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낯선 풍경에는 넉넉한 연금 덕분에 노후를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형 사회에서 온 이방인의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볼 때 마냥 부러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언론에서도 프랑스의 저출산 문제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자주 보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은 파리에서는 거리 풍경이 많이 젊어졌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단순히 젊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건강해진 느낌까지 들더군요.
사실 유럽 사회는 생각보다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강합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이면 독립하긴 하지만, 주말이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거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연대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 간의 유대감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지만, 더 이상 자녀가 태어나지 않으면 자연히 결속이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20년 전 파리는 그런 단절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의 파리는 이러한 문제를 점차 극복해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주말 거리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손녀가 탄 유모차를 끌고 젊은 부모들과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서울보다도 훨씬 더 자주 어린아이들을 마주칠 수 있더군요.
통계를 보니, 프랑스의 합계 출산율은 1990년대 약 1.6명까지 하락했으나 2010년에는 2.03명으로 반등했고, 이후로는 1.8명대를 꾸준히 유지해 왔습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한 국가의 인구가 유지되려면 출산율이 2.1명 이상이어야 하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북아프리카 등지에서의 이민 유입도 상당히 많은 점을 고려하면 우리처럼 급격한 인구 감소를 우려할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제가 본 파리의 모습이 프랑스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훨씬 젊어진 파리는 합계 출산율이 0.78명인 나라에서 온 제 눈에는 우려와 희망이 교차하는 풍경으로 비쳤습니다.
저출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프랑스처럼 점진적으로라도 개선되는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2) 독서하는 파리지앵
이제 어디를 가든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파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공간이면 어김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파리의 지하철에서는 조금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칸에 두세 명 정도는 종이책을 꺼내 읽고 있었습니다.
좌석에 앉자마자 가방이나 백팩에서 두툼한 책을 꺼내 읽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책장을 접고 일어서는 모습은 오랜만에 찾은 풍경처럼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휴대폰을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죠.
휴대폰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 책은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내용을 읽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끄는 대중적인 콘텐츠보다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는 점도 차이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빠르게 소비되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종이책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파리만의 개성처럼 느껴졌습니다.
3) 파리는 자전거 왕국
구글 지도로 목적지를 검색하면 네이버 지도처럼 여러 경로가 표시됩니다.
보통 자동차, 대중교통, 자전거, 걷기 등의 옵션이 나오는데, 20분 내외의 거리라면 놀랍게도 자전거가 가장 빠른 경로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이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파리는 자전거 왕국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자전거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공용 자전거 대여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부터 도입되었고, 시내 대부분의 도로에는 자전거 전용 도로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편도 2차선 도로에서도 한 차선을 자전거 도로로 만든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덕분에 일반 도로는 교통체증으로 막혀도 자전거 도로는 거침없이 달릴 수 있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듯했습니다.
파리 시 당국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석연료 자동차 대신 전기자동차를 장려하고, 나아가 전기자동차보다 자전거 이용을 더 권장하며 일관되고 강력한 정책을 펼친 덕분이겠지요.
4) 낭만의 도시 파리
파리하면 흔히 낭만과 사랑, 그리고 자유와 개방의 도시라고 하죠.
하지만 파리지앵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저희가 알 길은 없으니 어디까지나 상상에 맡길 수밖에요.^^
그런데 이번 여행 중에 꽤 재미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 탔을 때였는데,
저희 부부가 자리를 잡은 바로 앞자리에 백발이 희끗희끗한 커플이 앉아 있었습니다.
눈대중으로 봐도 저희보다 몇 살은 더 되어 보였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여행 중인 듯했습니다.
불어를 사용하는 걸로 보아 외국인 관광객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버스 안에서 꽤나 진한 딥키스를 연신 나누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리 파리라고 해도 이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힐끗거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애정을 나누는 모습에 살짝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ㅎ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부인지, 연인인지, 혹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나이에도 저렇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참 멋진 일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저희 부부도 스킨십이 조금 더 많아졌다면… 믿으시겠어요? 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