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넘다 보면 등구재라는 고개가 있다.
고개가 험하다거나 지형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 고개가 의미가 있는 것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라는 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매우 심각해서 선거철만 되면 이를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많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라는 것이 이렇게 고개를 넘는 하나의 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떠나 아내와 같이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이 고개를 넘으면서 왠지 맨발로 걷고 싶어서 신발을 벗어 배낭에 묶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내가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준 것을 훗날에 펜으로 스케치 해 본 그림이 위의 것이다.
우리는 내가 보지 못하는 우리의 뒷모습을 항상 누구에게 보여 주며 살아간다.
항상 앞만 보고 살아야 하는 젊고 바쁠 때에는 이 생각을 못하다가 어느새 인생을 한번 돌아보는 시점이 되면 이렇게 나의 뒷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나를 쳐다보는 나의 동료, 가족, 혹은 후배들은 나의 뒷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할까?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뒷모습은 혹시 추한 모습은 아닐까?
욕심만 내다가 흉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걸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첫 구절은 너무 유명하여 자주 회자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등구재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것처럼, 중년기와 황혼기의 경계에 있는 이 시점에 그날 등구재를 넘을 때처럼 잠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이 시기를 지나면서 나의 뒷모습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는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PS : 위의 글은 꽤 오래전에 제 일기장에 메모해 둔 글인데 오늘 갑자기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어제 후배 사원과 커피 한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사내에서 제법 경력이 되는 관리자급 여사원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이 선배로서 제 이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선배님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해내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이제 나이로 보면 60이 코 앞이고 곧 퇴직과 은퇴라는 인생 2막에 들어서야 하는 제게 큰 힘이 되는 피드백이었습니다.
제 뒷모습이 적어도 새로운 삶과 변화 앞에서 의기소침해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아서 종일 기분이 유쾌하더군요...^^